역사가 만만하긴 만만한가보다.

 정말이지 내 깜냥에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 관전자 1인이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말한다.


그러라고 만든 이오공감이 아닐텐데.

해서 그 대안으로 가칭 '이오만감'도 따로 하나 만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만감'이 교차하는 글을 '만인'이 볼 수 있도록.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완전 이글루스 유저들더러 마녀사냥할 싸움터를 대놓고 만들어주는 꼴이잖아? 안될거야(...)


'백제'가 '부여'를 공격했다고? - 2.물길설(勿吉說)과 고구려설(高句麗說).

 

 계속해서,『자치통감』의 영화 2년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를 공격한 백제'를 한반도나 요서의 백제가 아닌 별개의 실체로 간주하는 견해로는 현재까지 전연(前燕)설, 백돌(伯咄)설, 그리고 물길(勿吉)설과 고구려설이 각각 제기된 바 있습니다. 물론 이 글에서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물길설과 고구려설만을 살펴볼 생각인데, 그 이유는 다소 궁색하고 외람된 변명일 수 있겠습니다만 전연설이나 백돌설은 뒤의 두 설에 비해 일단 그 논리적 기반이 다소 취약한 편⑴이라 학계 내에서도 이제는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지 않은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는 훼이크고 사실은 그냥 귀찮아서. 여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먼저 물길설의 골자는 당연히 '서사근연'의 주체인 '백제'를 일반적으로 숙신(肅愼), 읍루(挹婁)의 후신(後身)으로서 종래 장광재령(長廣才嶺) 동쪽, 혹은 아성(阿城) 부근에 그 중심을 둔 것으로 간주되어 온 물길(勿吉)로 파악, 전기부여의 세력이 그들에 의해 서쪽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바로 부여와 읍루의 관계 변화인데, 읍루는 본래 한나라 시기 이래 부여에 예속되어 있다가 부여가 세금을 무겁게 하며 핍박하자 조위(曺魏) 시기 황초(黃初;220~226) 년간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부여는 그런 읍루를 누차 재복속시키려 했지만 '적은 수로도 험한 산지에 의지하여 뛰어난 활솜씨를 구사하는(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隣國人畏其弓矢)' 그들을 굴복하기란 쉽지 않았죠. 물길설은 바로 이러한 부여-읍루 간의 기존 관계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 뒤이은 5세기 무렵 물길이 보여준 일련의 '활약상' 또한 설득력을 더해 주는데, 그 실례로는 북위(北魏) 연흥(延興;471~476) 년간에 사신 을력지(乙力支)를 파견하여 북위-물길-백제로 이어지는 고구려 포위망을 제안한 일이나, 고구려 문자명왕 3년인 494년 물길의 공격을 받은 후기부여 왕실이 고구려로 내부한 일, 그리고 문자명왕 13년 북위에 간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가(珂;옥돌의 한 종류)는 섭라(涉羅;제주도?)에서 나오는데 부여는 물길에게 쫓긴 바 되어 구할 수 없으니...' 운운한 것 등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이 논의를 따른다면 물길은 읍루 시절 황초 년간의 대(對)부여 반란에 성공한 이후 꾸준히 힘을 비축해 동류 송화강(東流 松花江) 유역을 장악한 뒤 4세기 어느 시점에 녹산의 원부여를 침략, 이른바 '서사근연'에 이르게 했고, 나아가 문자명왕 3년에는 후기부여마저 완전히 구축해버린 것으로 여겨집니다⑵부여 캐안습ㅠㅠ.  

그러나 이같은 명쾌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물길설은 그 자체로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데, 일단 세력 신장 문제만 해도 기록상으로 물길이라는 존재는 5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고구려 북방 지역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따라서 물길설의 핵심을 이루는 전제, 즉 340년대 이전의 부여 동쪽 지역에서 물길, 혹은 최소한 그 이전의 읍루가 동류 송화강 유역을 장악하며 부여를 구축할 정도의 힘을 비축해 나가고 있었다는 추정은 사료상으로 검증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340년대 당시 모용선비의 전연은 인접한 고구려와 우문선비(宇文鮮卑) 세력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채 그들의 움직임이나 위협 정도에 대해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작 '부여를 서쪽으로 몰아낼 정도의 위력을 보여준' 물길이나 읍루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한다던가 하는 모습은 포착되지 않습니다(이러한 추론은 또한 역으로 기록의 '백제'가 만주 지역에 있어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 아닌, 어디까지나 기존 세력 구도의 한 축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만약 정말로 물길이 녹산, 곧 길림의 원부여를 '서사근연'에 이르게 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모용선비는 그들과 연계하여 고구려를 좀 더 손쉽게 공략할 구상을 세웠거나, 아니면 최소한 고구려 공격에 있어 그들의 존재가 중요한 향배로 작용할 것임을 염두에 두고 군사를 움직였겠죠. 좌우지간 이런 여러 난제들을 고려하자면 물길설은 3세기 읍루의 반란에서 5세기 물길의 남하 사이의 전개 변화를 매끄럽게 설명할 수는 있을지언정, 당시 여러 세력들 간의 정세나 동향을 폭넓게 반영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길설 이야기는 할만큼 한 것 같으니(?) 이제 고구려설을 살펴볼 차례인데, 그에 앞서 설과 관련된 몇몇 사료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군요. 먼저 같은『자치통감』진기(晉紀)의 기록입니다.

(342) 冬十月 (慕容)翰曰...[중략] 將擊高句麗 高句麗有二道 其北路平闊 南道險狹 衆慾從北道, (慕容)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面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從北道 從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從之. 十一月 自將勁兵四萬出南道 以慕容翰, 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寓等將兵萬五千出北道以伐高句麗 .高句麗王釗果遣弟武帥精兵五萬拒北道 自師羸兵以備南道 慕容翰等先至 與釗合戰 以大衆繼之...[중략]高句麗兵大敗 左長史韓壽 斬高句麗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追之 遂入丸都. 釗單騎走 輕車將軍慕輿 追獲其王母周氏及妻而還. 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 不復窮追 遣使招釗 釗不出.[후략]

(342년) 겨울 10월, (모용) 한이 이르기를...[중략] 장차 고구려를 치려 했는데,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어 그 북쪽 길은 평평하고 넓었으나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모용 한이 이르기를 "오랑캐(虜;고구려)는 일반적인 생각(常情)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를 따라올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응당 북면을 무겁게 여기고 남쪽을 가벼이 볼 것이니 왕께서 마땅히 정예병을 이끄시고 남쪽 길을 따라 공격하여 출기불의(出其不意;적이 전혀 뜻하지 않은 곳을 공격한다는 뜻) 하시면 환도는 취할 만한 것조차도 못 될 것입니다(不足取). 따로 편사(偏師;소규모 군대)를 보내 북쪽 길을 따라가게 하시다가 차질이 생긴다 해도 그 배와 심장(腹心;환도성)이 무너지면 사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용) 황이 이를 따랐다. 11월, 황은 스스로 경병(勁兵;정예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오며 모용 한과 모용 패를 전봉(前鋒;선봉)으로 하였으며 따로 장사 왕우 등에게 만 오천명을 거느리게 한 채 보내어 북쪽 길로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고구려왕 쇠(釗;고국원왕)는 과연 아우 무로 하여금 정병(精兵;정예병) 5만을 거느리게 한 채 보내어 북쪽 길을 막게 하였고 자신은 리병(羸兵;약졸)을 거느리고 남쪽 길에서 대비하였다. 모용 한 등이 먼저 이르러 쇠와 더불어 맞서 싸웠고 황은 큰 무리를 이끌고 그 뒤를 이었다...[중략]고구려군은 크게 패했고 좌장사 한수는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加는 경칭)를 참했으며 여러 군사들은 승세를 타고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마침내 환도에 들어갔다. 쇠가 홀로 말을 탄 채 달아나자 경거장군 모여니가 뒤를 쫓아 그 왕모 주씨와 아내를 붙잡아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왕우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해 무너졌는데, 이로 인해 황은 다시금 끝까지 추격하지는 않고 사자를 보내어 쇠를 불렀으나 쇠는 나오지 않았다.[후략]

위 사료는 342년 겨울에 있었던 모용선비 전연의 고구려 침공에 대한 논의와 그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모용 한의 구상을 바탕으로 수립된 전연군의 대(對)고구려 전략은 고구려 영토로 통하는 두 갈래의 길, 즉 평탄하고 넓은 북쪽 길과 좁고 험한 남쪽 길 중 북쪽 길로 주력군이 오리라는 고구려 지휘부의 허를 찔러 남쪽 길로 주력군을 진격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 전략은 정확히 적중하여 고구려는 수도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왕모와 왕비가 사로잡히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장사 왕우의 지휘 아래 북쪽 길로 나아간 소규모 군대(偏師)는 그곳에서 미리 전연 주력군의 습격을 대비하고 있던 고구려 정예에게 대패하였고, 그들의 남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던 전연 지휘부는 결국 고구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한 채 회군할 수 밖에 없었죠⑶. 

 그렇다면 고구려에게 있어 기사회생의 기회를 안겨준 전투가 벌어진 '넓고 평탄한 북쪽 길'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지금까지의 자료에 국한시켜 볼 때 해답의 실마리는 5세기 무렵에 쓰여진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이라는 금석문 기록에 있는 듯 보입니다. 전체적인 훼손 정도는 상당히 심한 편이지만그래서 아래 인용글도 발번역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_-; 우연인지 천운인지 판독이 가능한 부분들 중에는 이 고구려설과 밀접하고도 결정적인 관련을 지닌 글자들이 확인되기 때문이죠. 각설하고, 백문이불여일견이니 직접 기록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大使者牟豆婁...河泊之孫日月之子鄒牟聖王元出北夫餘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個□□治此郡之嗣治□□□聖王奴客祖先□□北夫餘隨聖王來奴客△□△之故△□□□□□□□世遭官恩... 慕容鮮卑氵使人□知河泊之孫日月之子所生之地來□北夫餘大兄冉牟...△祖大兄冉牟壽盡...恩敎奴客牟豆婁□□牟敎遣令北夫餘守事...대사자 모두루...하박(河泊;하백)의 손자이자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나셨으니, 이 나라 이 땅이 가장 성스러운 곳임을 천하 사방이 알지니... 노객(奴客;모두루)의 조상이... 북부여에서부터 성왕을 따라 (고구려로) 왔다. 노객... 한 까닭으로 세세로 관은(官恩;벼슬을 누리는 은혜)을 입었다. 모용선비... 사람을 보내... 하박의 손자이자 해와 달이 태어난 땅에 옴을 알고... 북부여대형 염모... 조상인 대형 염모의 수명이 다한 뒤... 은혜로이 교를 내리사 노객 모두루... 교를 내려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로 보내시고...  

 묘지명을 통해 우리가 미약하게나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모용선비의 침입이 있었던 시기 '북부여대형' 직책을 맡고 있던 '염모'라는 사람이 무언가 활약을 했고, 무덤의 주인이자 염모의 후손인 '모두루'가 광개토왕 시기에 '영북부여수사'로 임명되었던 것 역시 그 활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염모의 활약이 있었던 장소는 전쟁 당시 그가 맡았던 직책이 '북부여대형'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역시 북부여, 곧 길림 지역 주변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고구려인이던 그가 북부여 지역에서 모용선비의 침입에 맞서 활약했다는 사실은 해당 시기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지요. 또한 이를 통해 당시 모용선비의 고구려 침입이 단지 '좁고 험한 남쪽 길'로 통하는 고구려 중심부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넓고 평탄한 북쪽 길'이 나 있는 북부여 방면을 향해서도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전 포스팅의 첫머리에 제시된 436년 기록에서 '4세기의 어느 시점'에 녹산의 원부여를 서쪽으로 밀어낸 것은 '백제'였는데,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모두루묘지명'에서는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차지한 채 모용선비의 군대를 맞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군요⑷. 그렇다면 역시 '백제'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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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같은 일련의 논의들에 근거하여, 고구려설은 학계 내에서도『자치통감』346년 기사에 대한 해석과 관련한 일종의 '통설'로 자리잡고 있습니다⑸. 그리고 그 오기(誤記)의 원인으로는 역시 주지하다시피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예맥계(濊貊係)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그 뒤를 따르고 있지요무엇보다 고구려설은 궁색하나마 이렇게라도 설명이 가능한데, 백제설을 제외한 다른 설들은 그냥 '단순 실수' 이외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음. 역사 연구에 있어 사료의 교차 검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가르쳐주는 좋은 사례라고나 할까요. 여하튼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위백제소침 서사근연' 기사를 둘러싼 각 설들의 논지 전개를 대강이나마 두루 살펴 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백제의 요서 진출 여부를 좀 더 다룰 수도 있겠습니다만, 해당 사료를 둘러싼 여러 주장들을 제시한 수준에서 본 글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셈이니 역시 이 정도 선에서 그만 글을 마무리짓는 편이 좋을 듯 합니다. 수박 겉핥기처럼 두서 없이 쓰여진그리고 개드립으로 도배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제현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추후반성하고 기회가 닿는대로 더 좋은 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각  주- 

⑴가령 '전연설'을 따르게 되면 '위백제소침'의 '백제'와 '서사근연'의 '연'은 동일한 실체를 동일 사료의 동일 기사에서 각각 달리 기록한 것으로 무리하게 이해해야 하며, 녹산의 전기부여는 '전연에게 공격당해('爲前燕所侵') 전연 가까이의 서쪽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가(西徙近燕)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한 보기 드문 천연기념물급 병크 전연에게 공격당해 멸망한몰라뭐야그게무서워', 실로 괴이하기 짝이 없는 형국(...)이 되버립니다. 또한 '백돌설'을 따를 경우, 여기서의 '백돌'은 '위백제소침'의 실체를『수서(隋書)』의 말갈 7부 중 하나인 '백돌부(伯咄部)'로 간주하는 것인데, 이 또한 백돌부의 위치가 전기부여의 중심지 녹산의 서북쪽 방향으로 비정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백돌부를 포함한 말갈 7부 개념 자체가『수서』의 무대인 6, 7세기 무렵에 처음 등장한다는 점에서『자치통감』의 기록이 다루고 있는 340년대의 4세기와는 상당한 시간차가 자리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제가 달리 귀찮아서 안쓴 게 아니라니까요.

⑵종래에는 이 '부여 왕실의 고구려 귀부'를 고구려의 직할령이 후기부여 지역까지 뻗치게 된 것으로 간주하여 문자명왕 13년 무렵을 고구려의 최대 강역이 확보된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만, 요즘은 애초에 부여 왕실이 귀부하게 된 원인이 바로 물길의 공격 때문이라는 점이 부각되는 추세인지라 그 같은 견해는 부정되고 있습니다부여도 울고 문자왕도 울고 나도 울었다ㅠㅠ

⑶이 때 전연군은 생포한 고국원왕의 왕모와 왕비, 그리고 고구려 백성 5만여 호를 포로로 끌고 가면서 미천왕릉의 시신을 파헤쳐 가져가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때문에 이후 모용선비는 고구려에게 있어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근초고왕의 백제와 함께 물리쳐야 할 양대 철천지원수로 여겨지게 되죠. 두 세력 사이의 끈질긴 악연은 주지하다시피 광개토왕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고구려의 승리로 매듭지어지게 됩니다.  

⑷'북부여'는 자국을 가운데에 놓고 사방을 규정한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원부여', '초기부여'와 마찬가지로 녹산, 즉 길림에 중심지를 둔 본래의 부여나, 혹은 그 중심지인 길림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간혹 북부여를 '부여 북쪽의 부여'로 간주하여 부여의 건국자 '동명(東明)'이 도망 나왔다는 '탁리국(橐離國)', 혹은 '고리국(槀離國)'으로 보거나 아예 동일 시기에 복수의 부여가 함께 존재했다고 간주하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만, 그 가설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들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로서는 '주장' 수준 이상의 그 무언가가 제시되어 깊이 있게 논의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희박해 보입니다.      

⑸다만 고구려, 부여 방면에 대한 모용선비의 침입은 염모의 시대인 고국원왕 치세 동안만 해도 339년, 342년, 346년의 세 번씩이나 있었기 때문에, 염모가 정확히 몇 년도의 전역에서 활약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엇갈립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346년의 후기부여 공격 이후 모용선비가 북부여 지역을 공습했고, 염모는 이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은 것으로 여기는 견해가 다수였으나(339년의 침입은 부여와는 무관한 요동 지역의 신성(新城) 지역을 무대로 벌여졌기 때문에 일찌감치 제외가 가능합니다), 346년 기사의 마지막 대목, 즉 '부여왕 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그 딸은 모용 황의 아내로 삼았다'는 내용이나, 346년 당시 고구려가 앞선 342년의 침입에서 모용선비에게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후속되는 공격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살펴보았듯 논의의 흐름은 점차 342년의 침입 쪽으로 기우는 추세입니다. 

-참고 문헌-

김기섭,「부여족의 분산과 이동」

이성제,「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사에서 보이는 몇 가지 쟁점 -서진과 동이교위 그리고 전연의 역할을 중심으로」

정재윤,「백제의 부여 계승의식과 그 의미」

-상기 논문 출처:『부여사와 그 주변』(동북아역사재단,2008)

송기호 외,『한국 고대4국의 국경선』(서경문화사, 2008)

신채호,『조선상고사』(일신서적출판사, 1998) 



결론: 메인뒤시의_허접함이란.txt

...에레메스님은 이 기회에 돗자리 하나 까시면 되겠습니다.(응?;) 
     


'백제'가 '부여'를 공격했다고? - 1.소위 '백제설(百濟說)'에 대한 비판.


※본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졸문을 전재한 것입니다. 억지로 1부와 2부를 나눈 감이 없잖아 있기 때문에, 논지 전개에 있어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 제현들의 양해 바랍니다^^;



 (永和二年, 346)春正月...[중략] 初 夫餘居于鹿山, 爲百濟所侵 部落衰散 西徙近燕 以不設備. 燕王遣世子儁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七千騎襲夫餘. 儁居中指授 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以玄爲鎭軍將軍 妻以女.

 영화 2년(346년) 봄 정월...[중략] 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때) 백제가 침입한 바 되어 부락이 쇠하여 흩어지고 (모용선비의) 연나라 가까이 서쪽으로 이동했다. 연왕 모용 황은 세자 모용 준에게 모용 군, 모용 각, 모여근의 세 장군과 기병 만칠천기를 거느리게 한 채 보내어 부여를 습격케 하였다. 준은 가운데에서 지시를 내려 군사의 일은 거의 각에게 맡겼고, 마침내 부여를 뽑아내어(멸망시켜) 그 왕 현과 부락 오만여구를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황은 현을 진군장군으로, 그 딸을 아내로 삼았다. 


 북송(北宋)의 관료이자 역사가인 사마 광(司馬光;1019~1086)이 장장 67년여에 걸쳐 편찬한 이래 그 사료적 가치를 널리 인정받아 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인용된 위 단락의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 '부여'가 '백제'의 침입을 받아 '연나라 가까이의 서쪽으로 이동했다(西徙近燕)'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이 기록은 4세기 무렵 일반적으로 상정되는 부여와 백제 두 나라의 공간적 격차(만주의 송화강 유역과 한반도의 한강 유역)나 그에 기인한 군사 활동의 당위성 여부(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공간적 격차를 극복하고라도 백제가 부여를 공격할 만한 이유가 과연 존재했는가?), 그리고 그 실현 가능성의 미비함(설령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해도, 육로로든 수로로든 백제가 만주 한복판에 위치한 부여를 공격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등을 감안하면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인데, 이 때문에 여기서 등장하는 '백제'의 실체가 과연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일찍이 여러 설들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만 사실 이 논의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기록의 백제를 문자 그대로 백제로 보는 '백제설'일 것이고,

 

그 백제설의 제창자떡밥 살포자는 바로... 바로...(두둥)


예, 뭐 일이 그렇게 된 게지요(...)

 

 사실 한국 민족주의 사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단재 선생의 해석에 대해 일개 천학에 불과한 제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그냥 대놓고 말해 깐다는 것은 저 자신에게 있어서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옥석은 가려내어 분명히 하는 것이 소위 '학문의 도리'라는 것일 테니까 말입니다라고 허세부리고 개드립쳐봤자 이 글도 결국은 사골국물 우려내기일 뿐, 이미 옥석이란 옥석은 죄다 위대하신 선학들에 의해 가려질대로 가려져서 후학들은 도무지 건드릴 구멍조차 사라져 버린 지 오래임ㅇㅇ. 각설하고(...),『자치통감』에 실린 저 문제의 기록에 대한 단재의 설명을 보도록 하죠.『조선상고사』7편 2장 3절, '近仇首王 즉위 후의 海外 經略'의 내용입니다.    

 

[전략]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가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支那;'중국'의 비칭) 대륙에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北京)을 빼앗아 요서(遼西), 진평(晋平) 두 군을 설치하고 녹산까지 쳐들어가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開原)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으며...[후략]

 

 즉 간단히 말해 단재는 '백제의 부여 공격'을 '백제의 요서 진출'⑴과 동일 주체(근구수 태자)에 의한 연속적인 사건으로 간주한 것이죠.  

 

 그런데 얼핏 보면 참신하고 명쾌해 보이기까지 한 단재의 이같은 분석은 사실 좀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습니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4세기 무렵 부여를 공격한 것이 정말로 '요서 지역을 점령하여 승승장구하고 있던' '백제'였다면, 부여 왕실은 당연히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달아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자치통감』의 기록은 부여가 '백제'에게 공격당한 이후 그 중심지를 '연나라 가까이의 서쪽으로 옮겼다(西徙近燕)'고 명시하고 있죠. 다시 말해 부여를 공격한 '백제'는 그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동쪽, 혹은 동남쪽이나 동북쪽 방면에서 부여를 향해 공격을 가해왔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번 양보해서 단재의 저 주장이 맞다는 전제 하에 그 내용을 직접 지도에 표시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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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대충 이런 형국이 됩니다(...)

 

 단재 선생을 욕되게 했다는 사실에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저의 나약한 정신을 그만 가다듬고지명이 낯설게 느껴지실 독자 제현의 이해를 위해 지도의 표기를 잠깐 설명하자면, 노합하(老哈河)와 시라무렌(Siramuren;西拉木倫) 강을 넘어 북만주로 향하고 있는 주황색 화살표는 당연히 단재 주장의 핵심을 이루는 '요서 지역으로부터 출병한 백제군'이고,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북만주 지역의 빈 붉은색 원은 단재가 전기부여의 중심지인 녹산으로 비정한 '하얼빈', 그리고 하얼빈에서 붉은 화살표를 통해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아래 쪽의 붉은 원은 후기부여의 도읍지로 비정한 '개원'입니다⑵. 그런데 이 지도대로면 부여는 도망을 친답시고 도리어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요하 근처로 자국의 중심지를 옮겨버리는 꼴이 되는군요. 사실 다소 무리한 것처럼 여겨지는 단재의 이같은 지리 비정 및 상황 설명은 아무래도『자치통감』과 자신의 해석을 무리하게 합치시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오류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고고학적 자료가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당시의 시대 환경이나, 충분한 자료를 열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단재 본인의 처지와 같은 여러 상황들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겠죠그것봐요 저는 역시 단재 안티 아니라능(...) 

 

 여하튼 지금까지의 짧은 논의를 통해만 봐도『자치통감』기록의 '백제'를 '한반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 요서 지역을 점령하고 한창 기세를 올렸던' 바로 그 백제로 본 단재의 견해는, 그의 학문적 열정이나 애국애족심과는 별개로 실제 역사상의 사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⑷. 그러나 이런 안티 테제적 설명만으로는 "기록의 '백제'가 우리가 아는 그 백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라든가, "백제가 아닌 그 세력이『자치통감』과 같은 역사 기록에 굳이 '백제'로 기록되어 전해진 이유는 어째서인가"와 같은, 자연스레 촉발될 수 있는 일련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기 어려운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인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포스팅에서 본격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각  주-

⑴당연한 소리가 되겠습니다만 유물과 여타 증빙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은 그냥 립서비스일 뿐이고 실제로는 아예 없음 현 시점에서 '백제의 요서 진출' 논의는 하나의 '논의'이자 '가능성'일 뿐, 분명한 역사적 '사실'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물론 근초고왕이건 동성왕이건 간에 요서는 둘째치고 산동반도나 일본열도까지 백제 영토랍시고 뻔뻔스레 떡칠해놓은 환빠놈들의 패악질은 논의할 한 줌의 가치조차 없다. 남조측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요서 지역 장악 기사에 대해서는 일시적 진출설, 단순 거점 확보설 등 현재 여러 해석들이 병립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런 상황에서『자치통감』의 '위백제소침(爲百濟所侵)' 기사를 '요서 지역에 진출한 백제'와 연관짓는 견해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⑵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 기록을 토대로 할 때 전기부여의 중심지 '녹산'은 현재의 길림(吉林)의 동단산(東團山) 및 남성자(南城子;동단산성과 연결된 평지성) 유적과 용담산성(龍潭山城) 유적 중의 하나로 거의 확실시되며, 그로부터 '서사근연'한 후기부여의 중심지는 장춘(長春) 서북쪽 63km 지역에 위치한 농안(農安) 정도의 위치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만 길림의 경우 세부적인 비정 문제, 즉 왕성과 (부여인들이 투기한 부녀자를 처형하여 그 시신을 버렸다는)'남산(南山)'이 각각 어디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견해가 엇갈리는 편인데, 대개 왕성을 동단산성으로, 남산을 모아산으로 보는 견해(요즘 하는 짓거리를 보면 영 믿음이 안가지만 어쨌든중국 학계)와 왕성을 용담산성으로, 남산을 동단산으로 보는 견해(宋基豪), 그리고 용담산성에서 모아산까지의 넓은 광역을 왕도 전체로 간주하는 견해(李鐘洙) 등이 있습니다.   


전기부여와 후기부여의 중심지로 각각 비정되는 길림(吉林)과 농안(農安)의 위치.

4세기의 어느 시점에 부여는 길림에서 농안으로 '서사근연'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⑶가령 그가 '녹산'을 하얼빈으로 비정한 것은, 애시당초 그가 상정한 고조선의 세 분파(삼조선) 중 '신조선'의 도읍지가 바로 하얼빈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재의 고대사 인식 체계에 있어서 '신조선'은 부여로 이어짐으로써 그 정통성을 지켜나갔던 것이죠물론 믿으면 골룸.

 

⑷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또다른 '백제설'로는 기록의 '백제'를 '본래부터 부여 동쪽에 거주하고 있던 백제', 즉 '만주백제'로 파악하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이도학 교수에 의해 제창된 이 가설은 4세기 중엽 이전 원백제의 위치를 만주 일대로 비정하고, 요서 지역에서의 백제군의 활동 역시 이 '만주백제'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지요. 이 가설의 골자는 '본래 만주 지역에 존재하던 백제로부터 온조(溫祚) 집단이 1세기 무렵 처음 갈라져 나와 한강 유역으로 이동했고, 이후 4세기가 되자 만주의 백제 자체가 한강 유역으로 2차 이동하면서 강력한 정복국가를 형성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요서와 부여 지역에서 보이는 '백제'의 실체를 무난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는 학설이라 하겠습니다만,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고고학적 자료의 부족이것 역시 립서비스과 그 자체적인 논리의 애매함으로 인해 '사실'의 논의 안으로 편입되기에는 많은 무리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헌데 이거 써놓고 보니 어째 좀 상당히 짧고 싱겁게 끝나버린 느낌이그리고 희대의 개드립을 연이어 쳐버린 듯한 느낌이...

 

기분 탓인가...<-아니거든            

 

...

 

여튼 2부에서 뵈요...-_-;;



단상.

언제부터 논리적 '결함'과 '거짓말'에 대한 지적이 단순한 '잉여짓'으로 인식되게 되었는지. 
 
그게 왜 불편하고 고깝게만 느껴지는 건지 이해해보고 싶지만, 쉽지만은 않구나. 내 생각이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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